나의 공부 일대기 1편 – 영어
어떤 목적을 위해 공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막연한 잠재 가능성에 대한 대비조차도 이미 목적인 건가?) 여태 대충 알고 사용해왔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한 번 공부해보고자 했던 생각은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사실, 학창시절엔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그런 생각은 하지 못 했지만, 단순히 전혀 잘 하지는 못 해도 그걸 할 때 몰입이 되고 아주 좋아했던 것들이 있다. 물론 초등학생 시절까지로 돌아가버린다면야 내 꿈은 이 나이쯤 다들 넘본다는 대통령에서 과학자를 거쳐 화가(그냥 나 혼자 예술 한다는 자체에 만족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주아주 유명한 거장이 되고자 했다)까지, 중학생 시절엔 문학에 빠져 어떻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나마 좀 현실적이 되어 그 분야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면서도 막연히 ‘난 당연히 프로그래머가 될 거야’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도 말하고 다녀서 주변에서 지겨웠을 듯하다. 만약 그쪽으로 잘 생각해서 해나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도 영어가 부족하고 정말 못 하는 수준이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변함없이 좋아했던 수업 시간이 있다면 국어, 영어, 특히나 영어 시간이었다. 영어는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사주신 ‘시사 영어 회화(정확한 이름이 안 떠오른다)’ 때문에 좋아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4살 때부터 길거리에 다니면서 알파벳 놀이 파는 아저씨만 지나가면 그때마다 평소엔 뭐 사달라고 한 마디 한 적 없던 애가 ‘저거는 꼭 갖고싶은데…’라며 성격상 소극적으로 한 마디씩 했던 과거를 떠올려서 사주신 듯하다. 거기 테잎이 6개 들어있었는데 항상 컬러로 그려진 상황을 보면서 그 테잎에서 나오는 왠지 이국적인 분위기의 경쾌한 배경음악과 영어 발음에 중독되어 같은 부분을 여러번씩 듣다 보니 6개월 정도 지났을 때는 영어 표현 뿐 아니라 그 테잎의 물리적 스타트 포인트부터 엔드 포인트까지 돌아가면서 어느 시점에 정확히 무슨 소리가 난다는 자체가 외워졌다. 어떤 배경 음악이 어떤 시점에 나오면 ‘아, 이 다음엔 저 문장이 나온다’라는 식으로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초등학교에선 특정 아이의 부모님이 시간을 할애해서 일일 선생님으로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 시간만 왠지 기대됐던 느낌이다.
중학생이 되자 회화 테잎 같은 것은 신선함이 안 느껴져 중학영어 테잎이 새로 생겼음에도 그걸 듣는 흥미를 잃었지만, 워낙 초등학교 때 좋아하게 돼서 어느 정도 그런 감정을 유지했나보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현재로 올수록 좀 강인한 면이 생겼지만(나의 자기 암시와 메이킹의 힘인 듯), 중학생 때까지는, 이제와 좀 굴욕이긴 하지만, 내 성격이 너무 얌전하고 소극적이다 보니 이제와 생각하면 특별히 괴롭힌 것도 아니지만 당시엔 나 스스로가 특정 반 친구에게 쩔쩔맸던 시기가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 애는 나보다도 키 작았고 그렇게 싸움을 잘 한다든지 힘 센 것도 아니었는데… 아마도 아주 어렸을 적 아버지로 인해 주눅이 들어 타고난 나의 적극적이고 활발했던 성격이 그렇듯 소극적으로 침체돼 버렸다고 들었는데 그게 내 어린 시절 성격에 큰 영향을 준 듯하다. 오히려 그렇게 어렸을 때 일찍 온순하고 소극적 성격을 가지게 되다 보니 자라면서 이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점차 나를 강화하는 정신적인 암시를 스스로 계속해 나가 이렇게까지 된 것 같다. 게다가 중3 때 당했던 교통사고 이후엔 내 성격에 또 다시 격변이 찾아왔다. 어찌됐든 그렇게 내가 쩔쩔맸던 아이는 영어를 정말로 싫어했다. 그래서 항상 다른 숙제는 다 자기가 해와도 영어 만큼은 나보고 해달라고 강요했다. 나는 그 애가 때린 적 한 번 없는데도 그저 약간의 두려움과 또 영어 알파벳 적을 때의 손끝의 느낌이 좋다는 이유로 인해 그 애와 그 애랑 늘 붙어다니는 친구의 영어 숙제를 매번 떠맡게 됐다. 중1 때였으니까 대부분 숙제의 내용은 알파벳/단어 10번씩 적고 뜻 적어오기, 필기체로 10번씩 적어오기, 교과서 한 페이지를 노트에 베껴오기 등이었는데 다른 애들은 10회를 적을 때 나는 3개의 숙제를 해야 하니까 30회씩 적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에 그것이 힘들다거나 싫진 않았다. 그 이후로 중학생으로서의 내 영어 실력은 많이 향상됐고 필기체는 숙제를 하면서도 아예 모르는 애들도 있었는데 비해 난 아주 쉽게 쓸 수 있었다.
고1부터는 기존과 달리 나의 호기심과 관심사 영역이 대폭 넓어졌다. 모든 것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었고 그래서 오히려 꿈이 없었다. 뭐가 되고 싶냐고 다른 사람이 물었을 때, 너무 많은 것들이 되고 싶고 하고 싶다 보니 그것들이 오히려 꿈인지 아닌지 의식적으로 구분하지 못 했던 것이다. 고2 때는 담임은 아니었지만 내가 좋아했던 영어 선생님의 영향으로 원래 좋아하던 영어에 불을 붙이게 됐다. 그전부터 뭔가 외국인과 관심사를 얘기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고등학생인 나로서는 할 수 있던 최선은 펜팔이었다. 고1때 내가 시작했을 땐 펜팔을 하는 애들을 찾아보면 많이 있었지만 펜팔이라는 자체가 그리 잘 알려져 있진 않았기 때문에 펜팔이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됐는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다. 항상 내가 시작해온 모든 것이 그렇듯 아주 우연히 접하게 됐던 것 같다. 어쩌면 특정 신문의 조그만 광고를 발견하고 용기내서 전화로 문의해봤던 것 같기도 하다. 친구들 중에도 펜팔을 하는 애들이 없어서 내가 첫 외국 친구의 편지를 받았을 땐 반 친구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 반엔 일어 펜팔을 하는 친구도 생겨나고, 우리 학교엔 해외 펜팔이라는 교류 방식이 많이 퍼지게 됐다. 그걸 함으로써 영어를 잘한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냥 일상적으로 당연히 해나가야 하는 무엇으로 생각됐다. 그래야 내 생각을 전달하고 외국인 친구에게 창피 당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고3때는 몸이 너무 피곤했기에 다른 모든 과목의 공부를 포기했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엔 오로지 영어 사전만 가지고 외우고 영어 문제집 푸는 게 전부였다. 몸이 피곤하다가도 영어와 연관되면 그때만 잠시 안 피곤했다. 당시 우리 학교엔 ‘깜지’라는 게 있어서 연습장에 빽빽이 공부했다는 증거를 채워가야 하는 숙제가 존재했다. 난 영어만으로 매일 할당량의 두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야자 시간은 무조건 영어만 했고, 그러다가 몸이 피곤해지면 엎드려 잤다(이랬던 데에는 보이지 않는 사고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 간 이유도 있다).
대입 후에는 다들 노는 분위기인 1학년 때 교내에 어학원이 있기에 아무 생각없이 새벽반을 끊었다. 비록 학교는 2시간 거리였지만 어쨌든 회화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별 고민없이 등록했는데, 그런 내 행동이… 다들 놀아야 하는 1학년생으로서 선배들이나 동기들에게는 ‘쟤는 좀 괴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애’ 정도로 비쳤나보다. 나도 1학년 때 많이 놀았다. 공부 같은 건 우주에 맹세코 중학생때부터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열정을 가진 건 오로지 ‘교내 어학원 새벽반’ 이거 하나밖엔 없었다. 그 외에 전공이고 뭐고 공부한 적 없다.

20수년을 함께 해온 영어 서적들. 그러나 이 중에 완벽히 본 책은 드물다. 종합영어를 고1때 처음 학원에서 듣던 시점과, 그 후 고3때 혼자 필요성을 느껴 다시 대충 독학했던 시점과, 한참 후 강수정 선생님의 교재와 강의 들으며 왠지 부족하다 싶은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다시 종합영어를 들춰본 시점에서의 종합영어에 대한 나의 느낌은 각각 달랐다. 세 번째 봤을 때 비로소 종합영어의 높은 완성도를 처음 느꼈다. 그 전에는 슬렁슬렁 봐서인지 뇌가 덜 트였기 때문인지 의외로 내겐 종합영어 내용이 허술하게만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에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책들이 일부 빠져있다. 어릴 때 보던 책은 이상하게도 한 번 이사할 때마다 한 묶음씩 없어지곤 했다. 나이가 들어서야 이제 별로 볼 일 없다고 생각한 책은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버리기도 했지만. 책은 많이 본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무슨 분야의 책이든 단 한 권을 봐도 자신에게 가장 맞는 것을 선택해 완벽히 꿰뚫은 후 하산하여 남에게 강의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생각엔 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도 많이 읽는다고 상상력이 더 뛰어나지거나 문장력이 느는 건 아니다. 읽는 사람의 시점, 상황, 느낌, 핵심 쪼개기 정도에 따라, 단 한 권만 읽고 모든 걸 마스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50권을 읽어도 별로 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보면 위시리스트에 똑같은 종류나 똑같은 기술을 다룬 책을 십여권씩 넣어두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다 비슷비슷한 대상에 대한 책이라면 그 중 단 한 권을 찾아 꿰뚫는 것만으로 마스터가 가능하다. 한 권으로 마스터가 안 되는 사람은 100권을 읽어도 마스터가 안 되게끔 상수 값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변수가 아님). 이 경우 자신의 기존 마인드와 방법론을 바꿔야 한다.

컴공과 전공선택 교재. 아직 자바스크립트를 학원 다니며 공부하기 전이라, 첫 컴공과 수업 때 이 책 표지를 보고는 ‘자바’의 더욱 고급화된 웹버전 언어가 ‘자바스크립트’ 겠거니 하고 큰 오해를 했다. ‘김석주의 자바스크립트’였나 잘 생각나지 않는데 학원 자바스크립트 교재는 그것이었고 당시 나름대로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당시 학원 강사 분이 너무 핵심을 잘 찝어 가르치셔서 그랬던 듯하다. 스크립트류는 처음이던 내가 원래 알고 있는 얘길 듣듯이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예전의 오토캐드 강사가 그랬던 것처럼… 난 학교든 학원이든 선생님 복이 있다.

한때 아주 잠시 준비했던 7급 전산직 서적들. 내 일생 최악의 과목 한국사-_-. 고등학교때 국사, 세계사 과목이 제일 싫었고, 당시 학교나 사회적으로 이공계 선호가 전국적으로 에피데믹이던 ‘이공계 버블’ 분위기였는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명적인 국사 과목으로 인해 인문계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당시 학교에선 인문계 반 아이들과 이공계 반 아이들 간의 성적 차이도 컸다. 오늘날 이공계가 침체된 이유가 바로 당시의 이공계 버블이 피크를 찍고 붕괴됐기 때문이다. 역시 현재의 다수가 몰리는 길은 항상 지옥행임이 드러난다. 이공계가 죽어나가고 바닥 치는 시점에서 갈림길에 선 고등학생이라면 탁월한 선택은 당연히 이공계다. 항상 암흑과 죽음으로 보이는 외길을 택해야 산다. 몇 년 전부터 공무원도 팬데믹에 버블이 과열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 그 업계의 위기는 확정적이다. 아무도 안 해서 내가 처음 개시하는 것이든, 아니면 한때 몰락의 길을 걸어 이제 모두의 관심에서 잊혀진지 오래인 것을 택해 손질한다면 최고가 되어 성공할 수 있다. 내 체질상 한국사 과목이 싫었던 이유는 스토리 전혀 없는 교과서 구성 때문인 듯하다. 무엇이든 줄줄 스토리가 있어서 듣고 이해해야만 하는 나로서는 쓸데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생뚱맞은 연도 같은 걸 외운다는 것은 뇌 구조상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사도 싫어했지만 이원복씨의 6권짜리 만화 시리즈 ‘먼나라 이웃나라’는 정말로 재밌게 봤는데, 정규 과목 수업 내용 자체나 교과서 내용 자체도 그렇게 서프라이즈 같은 얘기 써놓지 말고 스토리가 드라마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역사도 옛날 얘기 하듯이 쭈욱 들려준다면 정말 재미있고 잘 했을 것 같은데 학교에선 그게 통 안 되니 타고난 나의 뇌 구조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그 역사적인 털보씨 책이다. 당시엔 신경쓰지 않아 몰랐는데 지금보니 털보씨 정말 책 두꺼웠네. 인쇄된 활자가 널찍널찍 시원하게 인쇄돼서 그런가. 98년 학원에서 C++을 배우기 전 96년도 휴학 당시에 집에 있는 시간엔 이 책으로 틈틈이 C를 독학했다. 어셈블리가 아니긴 해도 C로 새로운 개념의 운영체제나 또는 간단한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어야 겠다는 두 가지 절실한 목표가 있었다. 비록 각종 언어의 독학만 마치고 난 후에는 본질적인 목적 자체를 잊어버렸지만 :=)
나의 공부 일대기 2편 – 전산
대학 1학년 때(95년도)는 리포트를 컴퓨터로 작성하는 게 트렌드로 막 자리 잡기 시작하려는 기미가 있었다. 95년 초까진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학교 전산실에서 누군가 짜다 말고 저장해두고 간 C언어 소스 파일이나 각종 ARJ 압축 파일 같은걸 열어서 내용을 뒤져보거나 윈도우 3.1을 띄워 그림판에서 처음 이것저것 그려보고는 너무 아름답고 놀라운 프로그램이라며 감격했던 기억이 있다. 그림판과 함께 당시 출시됐던 도스용 워크래프트1이 전산실 컴에 깔려 있어 체험해 보고는 집에도 컴퓨터가 있어서 그림판, C언어, 윈도우 3.1, Mdir, 워크래프트를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2학기가 되어 드디어 컴퓨터를 구입했다. 같은 학번 친구 중에 C언어 책을 들고 다니며 공부하던 애가 있었다. 난 C언어에 대해 잘 몰랐지만 정말 좋아보였다. 게다가 중학생 시절 내 꿈이 뭐였든가? 바로 프로그래머 아니었든가. 나중에 그 친구는 컴공과로 전과를 했다. 나도 전과를 했다면 좋았으련만 당시 머리가 아직 트이지 않은 상황이라 준비할 수 있게 조금 더 일찍 생각지를 못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니 후회하진 않는다. 복수전공을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나중에야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필시 경제학과/영문과/컴퓨터공학과 이 셋 중에 하나를 전공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컴퓨터공학과가 아닌 학과를 들어가게 된 주원인은 당시의 너무도 순진하고 우매하고 우유부단한 나의 성격 때문이다. 원래 세 군데 지망 학교 모두에 컴퓨터공학 또는 전자계산학과를 써서 원서 넣으려 했는데, 한 군데는 성적이 아슬아슬한 느낌이라 통계학과를 넣고(넣으면서 차라리 인문계 학과에 교차지원이 가능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나머지 두 군데는 각각 전자계산과 컴공을 넣기로 결심했었다. 그런데 결국 나중에 입학한 학교에 당도했을 때 컴공과 선배들과의 면담도 한 번 해보지 못 한 채, 첨부터 우리 학과 선배들과 마주쳐버려 홍보 공세와 설득 그리고 내 성적에 대한 불안감 조장으로 인해 당시 인생을 전혀 모르고 순진무구했던 내가 드디어 결심을 까맣게 잊은 채 잘못된 선택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나중에 결국 타 학교 전자계산학과, 통계학과를 추가로 합격했고 입학한 학교의 컴퓨터공학과도 충분히 합격 가능했음을 알았을 때는 기분이 밝진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결국엔 다 내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결과인 것을. 공대생이면서도 항상 주위로부터 문과생이 확실해 보인다는 오해를 샀다. 심지어 사주, 관상, 이미지, 적성, 주변 사람들의 평가 이 모든 요소에 있어서 내겐 인문계가 적합한 것으로 나와 있으며, 스스로 돌이켜 봐도 뭔가를 깊이 연구하거나 파고들어 남들이 알아내기 힘든 교묘하고 신기한 열매 속 씨 부분을 발견하는 것에 매우 흥미가 있다.
그래도 학교를 다니는 순간은 그럭저럭 즐거웠던 듯하다. 2학년 초, 수업을 듣다가 과연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뭔가에 대해 뇌리에 스치면서 계시가 왔다. “~휴학해라~”. 짧은 순간이었지만 너무도 뚜렷하고 선명한 두뇌 속의 계시였다. 따사로운 4월의 어느 날 군대를 가는 것도 아닌 녀석이 휴학계를 제출하고 1년간 휴학하면서 여러 모임 활동을 했고 정말 많은 카테고리와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당시엔 어느 모임엘 가도 내가 거의 최연소자였기에 사람들과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휴학 당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캐드 학원을 다니며 오토캐드 과정을 수료했다. 당시엔 인테리어나 공간 디자인 같은 일이 멋있는 직업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실상 그보다는 캐드 자체의 매력과 손맛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캐드 자체가 재미있었고 설계, 구상, 디자인 이라는 개념들에 매우 끌렸기 때문에 아무런 미래 목적 없이도 단지 좋아서 그걸 계속 할 수 있었다. 휴학 당시엔 캐드뿐 아니라 컴퓨터음악도 공부하게 됐다.
휴학 기간 중에는 몇몇 모임에서 적극 활동하여 임원을 맡기도 하고 소프트웨어 개발 공모전에 아이디어를 제출해서 장려상을 타기도 했다. 배우러 다니는 시간과 모임에 참석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틈틈이 워드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엔 보통 한글문서 1페이지 당 워드 입력 단가가 2,500~3,000원 정도였고, 요즘과 달라 컴퓨터를 잘 못 다루는 사람도 많았으므로, 타이핑 속도가 800타 이상이기만 하면 원활한 워드 알바 수주가 가능했다. 심지어 한 번은 모 직업소개소 사장님께서 워드 작업 의뢰를 하셨는데 그 분은 이후에도 꾸준히 내게 일감을 맡기셨다. 기본 단가라는 게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도 그 분은 내가 어린데다가 뭔가 하려는 모습을 보고 도와주려고 하셨던 건지 모르겠지만 한글 1페이지 당 10,000원씩을 지급하셨다. 나는 양심상, 불편한 심기상 도저히 받을 수 없어 거절했지만 그 분은 막무가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문서 번역 단가 최저 마지노선이 한글 문서 영한 번역 1페이지 당 15,000~20,000원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그 단순한 워드 알바보다도 대우가 못 한 것 같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책 번역은 단가가 아예 그보다도 훨씬 낮지만… (생각해 보면, 당시 내가 어렸기 때문인지 주변에 여러 분야에서 날 도와주려 하신 분들이 꽤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 분들께 예나 지금이나 진심으로 감사한 생각이다) 나의 PC통신에서의 각종 모임 활동으로 인해 내 아이디와 연락처가 어떤 경로로 알려졌는지, 몇 차례는 컴퓨터 학원으로부터 강사로 일할 생각이 없냐고 연락이 오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사회 경험과 대중 앞에서의 말하기 경험 등을 위해 매우 좋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집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당시엔 교통편도 불편하고 여러 가지를 이곳저곳 다니면서 배우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런 좋은 의뢰가 들어온 기회들을 빤히 바라만 보고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아서는 아무리 멀고 시간이 없었어도 어떻게든 했어야 했다고 생각되지만 당시엔 너무 내 사고방식 자체가 소극적이고 잘못 돼 있었던 듯하다.
4학년 때는 어차피 교양도 별로 내게는 쓸모 있는 과목이 없는 것 같아서 나의 이상향이자 로망이던 컴공과의 전공을 몇 개라도 이수하기로 했다. 그건 어차피 내가 좋아서 택한 것이지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더구나 좋아하지 않는 일은 남들에 비해 더욱 더 할 수가 없는 나의 유전인자와 두뇌 구조 때문에, 나와 너무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과목들을 전공하면서는 학점도 좋지 않았기에 굳이 불필요하게 생각되는 교양 과목을 듣고 구차하게 학점 올릴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교양 과목 대신에 C 알고리즘, 자바, MFC 등 4과목 정도를 컴공과 전공선택으로 들었다. 놀랍게도 당시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오후엔 강남에 있는 컴퓨터학원에 다니면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 했으나 필수적으로 생각된 자바스크립트와 기본 C++ 과정을 수료했다. 단순히 프로그래밍 자체에 매력을 느껴서 미래의 직업 같은 목표로 생각지도 않은 채 그냥 무작정 하고 싶어서 했다. 대학 다니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게 있다면 바로 ‘도스+윈도우3.1′ 같은 ‘운영체제’를 내 손으로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빌게이츠의 MS-DOS 6.2는 이제 가볍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주고 분홍토끼OS 1.0의 시대가 막을 올려야 할 시점이라고 우습게도 당시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냥 꿈이 그랬다는 것이지 사실상 절대로 나의 당시 프로그래밍적 지식적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허구나 이상과도 같았다. 불가능해 보이든 말든 나는 운영체제를 제작하는 것이 당시의 가장 큰 바람이자 희망이었다. 근본적인 지식이나 핵심도 모른 채 공룡이 그려진 양장본의 운영체제 원서를 사놓고 보려는 결심을 했으나 이런저런 핑계로 거의 보지 못 했고 어셈블리도 아닌 기존에 배운 C언어를 가지고 도스 상의 윈도우 3.1을 흉내 낸 그래픽 인터페이스만 뜨는 그런 것을 만들다가 중도 포기한 기억이 있다. 당시 하이텔 소프트웨어 동호회인지 운영체제 동호회인지에 K-OS라는 운영체제 (디스켓으로 부팅되고 명령어 하나 없이 단순히 프롬프트만 뜨는 수준)를 만든 분이 있었는데 내가 발견했을 당시 군대를 간걸로 돼 있었다. 그 운영체제를 디스켓에 카피해서 부팅해 보고는 얼마나 가슴 떨면서 존경스럽게 생각했던지… (이 분의 실명도 알았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백업해둔 1990년대 문서 어딘가에 들어있을 텐데… 김XX 였는데^^ 외자였나?=_=)
나는 졸업 후에야 군대를 갔고 제대 후 2004년도 초엔가 나의 첫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당시엔 웹 페이지에 대한 아무런 시각적 기능적 안목도 없었고, 이것저것 기존에 배워놓은 낡고 먼지 앉은 자바스크립트와 제대 후 모 사이트에를 통해 독학한 html 작성법을 가지고 이래저래 볶아 매우 독특한(?) 홈페이지를 완성했다. 그 후 사이트를 십여 차례 리뉴얼 하는 과정에서 php, smarty 템플릿, css, 플래시, 액션스크립트 등을 익히게 됐다. 긴 경험 끝에 얻은 결론은, 결국 사이트는 가장 심플한 것이 가장 오래 가며 무난하고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누구나 초기의 심리가 그렇듯 홈페이지에서의 우클릭 방지나 드래그 방지에 대단히 신경을 썼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시간이 흐르며 정말 쓸데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더구나 오히려 접근성에 상당히 방해가 되니 말이다. 내가 방문자로 입장이 전환되어 타 사이트를 볼 때 스크립트 방지 처리 돼 있으면 그 사이트는 아예 안 보고 나온다. 왜냐하면 만일 좋은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드래그가 안 되어 나중에 자세히 읽어보기 위해 복사하기에도 수고가 따른다(무단 퍼가기를 방지하고자 하는 취지야 이해하지만 다른 순수 목적을 가진 사람들까지 불편을 겪고 결국 무단 퍼가기를 원하는 사람만 귀찮음을 무릅쓰고라도 끝까지 퍼가게 마련이기 때문에 일거양실이다). 게다가 그런 사이트 치고 정말로 독자적이거나 유용한 자료들로 채워진 경우는 보지 못 했다. 사실 추가기능 하나만 설치하면 그런 스크립트를 모두 제거한 채 페이지의 모든 내용물을 다 가져갈 수가 있다. 제 아무리 nhn의 복잡한 네이버 블로그/카페의 게시물이라도 긁어가려고 맘만 먹으면 한 순간이다. 컴퓨터 안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은 가져가거나 녹음할 수 있다. 이것은 기술이 해리포터의 마법 수준으로 진화하고 명왕성까지 1일 왕복권이 되며 암 덩어리는 손으로 개인이 집에서 쉽게 들어낼 수 있는 기술의 시대가 된다 하더라도 결단코 막지 못 한다는 진리는 이미 명백하며 영원하다. 기술을 기술로는 못 막고 다수인의 의식 전환 소용돌이를 대거 불러일으켜야 한다. 본인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라면 클릭 1회 정도쯤 귀찮지 않게 마련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현재의 워드프레스라는 CMS 플랫폼으로 옮겨 오기까지 다양한 플랫폼과 페이지 방식을 작성해 보면서 사소하나마 각종 지식과 정보를 쌓을 수 있었다. 원래 학창시절 운영체제 다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게 있다면 2위가 RPG 게임이었고 3위가 CMS(당시로서는 그저 게시판 위주의 플랫폼 정도의 개념)였다. 역시 그 당시 제로보드는 너무나 존경스러운 bbs 툴이었고, 내가 처음부터 직접 개발하고 접근하기엔 이미 완성도나 복잡도가 너무나 높아져 있던 상태의 툴이다 보니 그저 존경스럽고 대단해보일 뿐 어떤 내가 제작자로서 시작하기 위해 참고하기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모델이었다.
제대 후 3년 정도 문서/논문 같은 것을 개인적으로나 번역 에이전시를 통해 수주 받아서 작업하고, 동시에 다음 편에서 얘기하겠지만 배워놓은 컴퓨터음악을 활용해 일본 음악 가라오케 곡들을 카피하는 작업을 한 몇 년 병행했다. 그 중간에 누구나 따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조차 없어보이게 전락한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건 어디 가서 땄다고 내밀 수도 없을 만큼 유용하지도 않고 경쟁력도 없는 자격증인 것 같다. 자격증 하나 더 따기 보다는 차라리 응용력과 실질적인 적용 능력을 키우는 게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