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부 일대기 3편 – 유년기와 음악

나의 유년기의 몇 가지 배경과 나에게 음악이란 어떤 존재였는지 적어본다. 생일이 빨라 초등학교를 7살에 들어간 나는 한 살 형과 누나뻘인 초등학교 동기들이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선희, 이문세 등 유행가 가사를 줄줄 따라 부르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난 그런 가요를 따로 접해 보지도 않았고 그런 대중가요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아이들이 흥얼거리던 노래 중 일부는 멜로디가 내 맘 속에 박혔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나랑은 상관없다는 생각에 가요를 접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유년기 때의 난 지금 돌아보면 신기할 만큼 소극적인 성격으로 심지어 라디오나 TV도 부모님이 틀어 놓았을 때나 보는 정도였기에 심지어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실 때에도 내 손으로 TV나 라디오를 직접 켠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으며 아예 생각지도 못 했다. 가끔은 만화도 보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허가하는 몇 가지 프로그램에 한하여 시청이 가능했다. 그렇듯 나와 미디어(음악 포함)는 서로 매우 동떨어져 존재하는 관계였다.

그래서 음악은 듣는 것에도 관심 없었지만, 특히 노래 부르기나 악기 연주는 매우 싫어했다. 우리 집이 당시에 큰 식당을 했는데, 아버지의 조기교육(?) 성화로 인해 난 4살 때 그 식당 2층에 있는 접대실에 갇혀서 중학생 음악 교과서의 음표를 그대로 음악 노트에 옮겨 그려야 했다. 구구단을 외다가 하나 틀리거나 음표를 하나 잘못 그릴 때마다 한 대씩 회초리 맞았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교육적 강요로 인해 내가 하고 싶거나 놀고 싶은 것에 있어 매우 제한받다 보니, 선천적으로 타고났던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이 모두 숨죽기에 이른다. 본래 4살 이전까지의 내 타고난 성격은 길에서 마주친 처음 보는 아저씨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대화하는 수준이었고 낯가림이 전혀 없이 적극적이었다. 어렸을 때는 동물에 호기심이 많았고 그림 그리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언제나 과학자와 화가가 될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 당시 처음 보고선 가장 갖고 싶던 전자계산기, 모형 비행기, 알파벳 놀이판은 끝내 얻지 못 했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을 강요받았다. 다른 애들은 초코우유, 딸기우유를 마음껏 먹을 때 난 유해하다는 부모님의 판정으로 흰 우유 이외에는 먹지 못 하게 철저히 금지를 당했을 정도였다. 유치원에서 내 그림이 입선하여 미국 미술 유학의 기회가 생겼음에도 아버지는 어린 내게 그 사실을 숨기신 채 그 길을 원천봉쇄해버리셨다. 평소에도 아버지는 매우 보수적이고 내 입장에선 고리타분한 전근대적 사상을 지닌 분이다 보니, 늘 하셨던 말씀이 ‘그림 그리면 나중에 빌어먹는다.’였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소릴 너무 자주 들었기에 머리에 박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도 음악을 가르치려 시도하셨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덕택에 미술은 내 인생에서 일찌감치 싹이 잘려버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의 화근은, 어느 날 내가 음표 옮겨 그리기를 거부한 채 평소 쌓여왔던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음악 노트에 과거 그려왔던 내용을 시커먼 고무지우개로 있는 힘껏 문질러 다 지워버린 일이었다. 그로 인해 난 발가벗겨진 채로 심하게 맞은 후 밥그릇 한 개와 함께 식당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아버지는 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태세였다. 당시 우리와 함께 살았던 막내고모가 아버지와 그 일로 심하게 싸운 후 나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무튼 난 4살 때의 그 사건 이후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았고, 이후 뭔가를 원해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성격이 되었다. 초등학생 때도 움직이거나 활발하게 행동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결국 그 일 하나로 내 전체적인 성격이 전환됐고 그 나쁜 기억으로 인해 움직임과 적극성을 요하는 예체능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남보다 먼저 나서서 뭘 한다든지 당연한 내 권리를 챙긴다든지 할 생각을 아예 못 하게 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 돼버렸다. 결국 그로 인해 이미 일찍부터 난 음악을 싫어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게다가 모든 일에서 자신감과 주관을 잃었기에, 남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악기를 다뤄야 하는 실기시험을 증오하기에 이른다. 아직도 지니고 있는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롤링 페이퍼엔 공통적으로 친구들이 적어주는 한 문장이 있었다. “너무 얌전하고 수줍음이 많은 것 같아. 왠지 아기 같아. 자신감을 가져 봐”. 성적 통지표의 담임교사 의견란에도 매 학년 “다 좋은데 아이가 너무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입니다. 움직이는 것과 운동을 매우 싫어합니다.” 같은 일관된 내용이 적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다시 전환기를 맞았다. 조금 친해진 키 큰 친구가 있었는데, 키가 작은 편에 속해 항상 앞 번호였던 나로서는 어떻게 그 친구와 친해지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돌아보면 고등학교 때까지도 내겐 키 큰 친구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친구는 음악을 잘했고 좋아했다. 초등학교 부서활동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음악부원이었고 나는 딱히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 어느 부서에 들지 모르던 차에 그냥 그 친구 따라 강남 가기로 했다. 음악부에 든 것은 단지 그 친구가 음악부원이기 때문이었지 여전히 음악 자체를 좋아하진 않았으므로 대충 활동했다. 4학년 때 국어시간에 시조를 노래로 부르게 된 적이 있다. 담임선생님이 몇 명을 일으켜서 그 시조를 노래 부르게 하셨는데, 그때 내 노래에 애들이 평균 5점 만점을 줘서 노래한다는 것에 있어 처음으로 약간의 자신감을 얻게 됐다. 그 후 도덕시간에 도덕 선생님이 ‘건전가요’라는 것을 수업 시간마다 하나씩 가르쳐주셨는데 가끔씩 불러보게 시키셔서 한 번 내가 불렀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선생님으로부터 목소리가 맑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때부터 노래 부르기가 좋아졌고 모든 음악 실기시험에서 기존의 ‘양’ 대신 ‘수’를 받게 되었다. 음표 그리기의 어릴 적 악몽을 씻어내고 새로운 음표 그리기의 재미를 형성해 나가게 된 반전 계기였다. 초6때 시화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때 쓴 시로 크게 칭찬받고 상도 받았다. 그때부터 글쓰기에도 약간의 관심이 생겼는데, 중2때 역시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전학만 아니었으면 단짝이 될 뻔했던 친구를 따라 문예부 활동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 글을 많이 써보게 돼서 글짓기가 늘었고 글쓰기를 좋아하게 됐다. 내겐 글쓰기도 음악을 좋아하게 된 데에 영향을 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공부 일대기 4편 – 컴퓨터 음악
대학 2학년 때 휴학하고 1년간 여러 가지를 배우러 다녔고 각종 모임 활동을 하면서 여러 분야의 이것저것 손도 댔지만, 그때 또 관심 가졌던 것이 컴퓨터 음악이었다. 실은 컴퓨터 음악에 약간의 관심이 싹텄던 것은 더 오래 전이었다. 고1때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고, 나는 고1 여름방학 때부터 그들의 음악의 핵심을 발견하게 됐다. 그의 음악을 듣는 것만도 당시로선 아주 좋았지만 너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음악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시 테이프를 분해해서 앞뒤를 거꾸로 뒤집어 넣은 뒤 틀어보곤 했다. 그의 음악은 뭐랄까 어찌 보면 예술 쪽이라기보다 과학실험이나 기술적인 느낌이 강했다. 난 당시 그런 점 때문에 더욱 빠져들었다. 지금 세대나 지금 시기의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어떻게 이런 음악이 이런 환경에서 가능한지 의아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해외 음악 장르의 특색들을 도입한 성격이 강하다 해도, 그 이전에는 누구도 그 시점의 사회적 선입견에 대치되는 스타일의 음악을 그런 식으로 시도해서 결과적으로 큰 성공으로 승화시키고 당시의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거나 놀라게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으면 호기심이 올 차례인 거다. 호기심 때문에 테이프 뒤집어 듣는 것만으론 성이 안 찼다.
IBM PC는 대입 후에야 구입했지만, 중1때 이미 아버지께서 조립하신 애플 컴퓨터가 있었다. 나는 그 컴퓨터를 두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첫째는, BASIC이라는 프로그래밍 툴이 들어있어서 부팅하면 바로 그 파란색 화면의 basic 모드로 들어갔는데 goto문을 사용해서 설명 책자를 보고 프로그램 명령을 간단히 입력해 보곤 했다. 둘째는, 거기 설치돼 있던 ‘요술나무’나 ‘팩맨’ 같은 단순한 게임을 하는 일이었다. 키를 잘못 눌렀을 때 나오는 비프 음이나 게임 플레이 시에 나오는 매우 단순한 전자음들의 연속이 그땐 정말 듣기 좋았다. 중2가 되었을 때 1학기가 채 가기도 전 안양으로 이사해서 전학을 가게 됐다.

전학한지 얼마 안 되어 집에 새 전축이 생겼는데 아버지께서 그 당시 ‘원미연’이나 ‘이지연’의 컴팩트디스크(그 당시 CD 라벨에 적힌 호칭)를 사오셨다. 당시엔 거의 카세트테이프 아니면 LP 위주였기 때문에 CD라는 매체가 음반의 주류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게 이지연 CD는 매우 신선했다. 할머니 계신 시골에 내려갈 때면 우리 차 안에서 항상 이지연 노래가 끊임없이 반복 재생됐다. 원래 그전까지는 어떤 노래를 대충 흥얼거릴 줄 알더라도 그 노래의 가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듣곤 했는데, 이지연은 내가 가수 이름뿐 아니라 그 가수의 모든 노래 제목을 외운 최초의 가수였다. 게다가 베스트 앨범이어서인지 전곡이 다 좋았다. 중2가 된 후 추석 무렵에 희대의 온가족 대참사를 당하고 난 뒤, 죽었다 깨어난 나의 성격에 격변이 일어났고 모든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사고를 뒤로한 후 중3이 되고부터는 음반 가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나의 성격으로선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성격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그 전에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가능해졌다. 전에는 상대방에게 해야 할 말도 하기를 꺼렸던 반면 그 시점 이후로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성격이 됐고, 불만이나 부당함이 느껴지면 그 자리에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에는 전혀 몰랐던 일들에 대해 가끔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쳐서 알게 되는 것도 있고, 조금의 예지력과 예지몽이 생겼으며 상상력과 결단력도 기존에 비해서 증대됐다. 처음엔 이러한 성격 변화를 스스로 알지 못 했는데, 주위에서 얘기해줘서 스스로 주의 깊게 관찰하다 보니 알게 됐다. 당시 사고로 2개월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먼저 퇴원한 동생이 카세트와 클래식 음악 테이프를 갖다 줘서 매일 병원생활의 무료함을 클래식을 들으며 달랬다. 그때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생겨서 퇴원 후에도 음반점에 가서 클래식 CD를 하나씩 사 모았다. 난 음악을 좋아해도 작곡자나 곡명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들어서 좋은 것으로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클래식 곡의 이름을 일시적으로 알아야만 CD 구입 자체가 원활했기 때문에 클래식음악에 대해 조사하고 들어봐야 할 곡들을 목록으로 추렸다. 클래식 전용 라디오 채널에서 맘에 드는 곡이 나오면 이름을 얘기할 때 잘 듣고 적어두거나, 사회자가 곡 제목을 너무 빨리 말하거나 발음이 뭉개져서 안 들리는 경우엔 공테이프에 그 부분을 녹음해서 반복해 들으며 곡명을 알아냈다. 그러던 중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모 채널에서 ‘테이크 댓’이라는 그룹의 팝을 접하게 됐다. 처음 듣는데 너무 달콤하고 천국 같은 느낌이 나서 주의 깊게 이름을 받아 적고 나서는 다음날 곧장 레코드 가게에 가서 테이크 댓 음반을 사온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니 분위기가 중학생 때와 많이 달랐다. 내 예상 속의 고등학교와 실제 학교의 분위기는 너무 달라서 신선함과 함께 두려움도 생겼다. 중3때 사고 때문에 체력장에 아예 참석하지 못 해 0점을 받았고, 그로 인해 원래 목표했던 것보다 한 단계 낮춰 지망한 학교에 들어간 것도 예상과 다른 낯선 분위기에 한 몫 했다. 그 낯선 분위기의 신선함에 적응할 무렵 일상의 신선함을 부추기듯,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고2때는 우주적으로 헤비메탈이 팬데믹이었기에, 반 친구 중 메탈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거의 절반 이상의 애들이 헬로윈이나 메탈리카에 심취해 살았다. 야자 시간에도 귀에는 언제나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마치 컴퓨터 영상과 오디오에 많은 자원이 소모되듯이 사고 이후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에 의해서도 몸이 쉽게 피로해졌던 나는 학교에서 카세트를 들을 엄두도 못 냈는데, 몇몇 친구의 권유로 들어본 이후 메탈리카 음악에 빠지게 됐다. 헬로윈 류는 아무래도 내 체질이 아닌 듯싶었고 역시 메탈리카가 내겐 최고였다. 메탈리카 노래를 듣고 있으면 특수한 배경그림들이 그려지거나 특정 분위기가 느껴졌다. 장르와 상관없이 언제나 좋은 음악들은 듣는 도중 뇌 속에 특정한 배경그림이 그려지고 그 위에서 필름이 돌아간다. 수능 실전 날 내게 안정감과 직관력을 준 여러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메탈리카의 And Justice for All 이라는 곡을 듣고 전날 일찍(저녁 8시, 일찍 잠든 최고기록) 잠들었다는 점이다. 음악의 초자연적 능력은 놀랍다. 심지어 어떠한 종교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도 있다. 이 곡이 뇌 속에서 무한 반복되면 난 어느덧 마음의 안정을 얻고 미묘한 호르몬이 흘러나옴을 느꼈다. 메탈리카 3, 4, 6집은 도시의 회색과도 같은 느낌과 함께 우주의 공허감과 새벽 가로등을 연상시키며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때부터 각종 리믹스 음반, 재즈 음반, 팝 음반, 메탈 음반 등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생각나면 무작위로 선뜻 음반점에 들어가서 딱히 사려던 게 없음에도 마치 퀴즈 정답을 찍듯 감이 오는 재킷의 음반을 탁 찍어서 2장씩 사오곤 했다.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그 중에 에러는 없었다. 모두 후회 없는 음반들이 됐고 듣다 보면 그 곡이 조만간 유명해져 있었다. 고2~고3때는 가요라곤 서태지 외에 듣지 않게 됐지만, 해외 음악을 굉장히 다양하게 접한 시기였다. 뇌 속에 특정 배경과 애니메이션을 제공하는 음악 위주로 듣다보니 그랬던 것 같다. 너무 빠져들어서 집에 있는 100%의 시간은 뭘 하든 CD를 들으면서 했다.

1 초반엔 아직 서태지 노랠 안 좋아했던 데다, 당시 ‘반짝 가수’라는 개념이 난무하던 음악계에 대해 부정적 선입견이 있었으므로 서태지와 아이들 역시 좀 그런 부류가 아닐까 하는 섣부른 판단에 이유 없이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방하고 다녔는데, 그때 우리 반에 서태지의 ‘난알아요’에 한창 빠져서 나에게 듣기를 매일같이 강요했던 한 성격 좋은 친구가 있었다. 나중에 그 친구가 준 테이프를 마지 못 해 가끔 듣다가 8월이 지났을 무렵 티브이에 ‘환상속의 그대 테크노믹스 버전’이라는 게 흘러나오는데 아~ 이건~ 너무 좋은 거다. 원곡을 내가 그 친구 땜에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원곡과 달라진 미묘한 부분들이 속속 들어왔으며, 섬세한 재 편곡으로 인해 음악의 음자도 모르던 나에게도 서태지라는 한 인간 자체가 너무 ‘환상 자체의 그대’로 보이고 들렸다. 그렇게 내가 서태지 음악에 빠진 후 고2가 되었다.

당시 우리 학교엔 좀 느끼하게 생기고 겉멋 들어 보이는 아주 젊은 음악선생님 계셨는데, 클래식만 자주 틀어주며 권위적인 모습을 보였던 다른 음악 선생님들과 달리 그 선생님은 컴퓨터 음악도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태지의 난알아요에 쓰인 샘플링 기판(나중에 신디사이저에 들어가는 확장보드로 밝혀짐)도 여러 종류 갖고 있는데, 그것을 기기에 꽂으면 실제 악기 소리도 나고 변조된 여러 가지 음이 나온다고 하셨다. 만날 미디 파일이나 다운로드해서 재생해보는 게 고작이던 난 그 얘길 처음 듣고 솔깃했다. 본래 나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접근법을 몰랐기에 궁금증이 굉장히 컸다. 내가 서태지 음악 좋아한다는 사실을 반 친구들이 그 선생님께 말하게 됐는데, 그 선생님은 손수 난알아요를 카피한 반주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다음 음악시간에 가져와 틀어주기로 약속하셨다. 호기심이 강력접착제 이상이었던 난 다음 음악시간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선생님이라는 신분의 사람이 입 밖에 낸 약속을 안 지키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기에 이후 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됐다. 그때 그 선생님이 약속을 안 지키신 덕분에, 오히려 컴퓨터음악에 대한 나의 호기심과 욕구는 더욱 커졌으나, 달리 정보를 얻거나 접할 길이 없어 정체된 상태였다.

그 후 대학에 입학했고 첫 IBM 컴퓨터를 샀는데, 당시엔 컴맹이라 조립할 줄 모르니 삼성 매직스테이션을 샀다. 그 모델 시리즈에는 번들로 Voyetra orchestrator plus 라는 미디 프로그램이 딸려왔다. 화면에 건반이 뜨고 누르면 소리도 나니 매우 신기했다. 당시엔 그저 그걸 띄워놓고 하이텔 미디 동호회 자료실에서 그 느려터진 전화 모뎀으로 밤새 다운로드한 여러 미디 파일을 열어서 들어보고 어떤 원리로 소리가 나게 되는지를 관찰했다. 정말 신기했다. 마치 뮤직박스의 발음 원리와 비슷했다. 그 소프트웨어로 인해 고등학교 시절 호기심의 불씨가 다시 급속히 커져버렸고, 때마침 PC통신의 전성기였으므로 하이텔 등의 온라인 통신 동호회 등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이용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난 컴퓨터음악을 독학하게 되었다. 당시 CD라이터 2배속 파이오니아 신제품이 370만원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기술 발달의 속도는 놀랍다. 하긴 벌써 1세기나 지나버린 시점이구나.^^

대부분의 컴퓨터음악 입문자가 첫 악기로 외장 음원 모듈이나 신디사이저를 구입해서 시작하는 데 반해, 난 샘플러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샘플러 구입을 결심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무턱대고 AKAI사의 CD3000XL이라는 샘플러를 구입했다. 현재는 음원 소프트웨어들이 고수준이 되어서 공간과 전력을 소비하는 외장악기들의 가격이 낮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가격이 250만원 정도였기에 할부로 구입했다. 물론 이것을 8년 후 중고로 15만원에 팔았다^_^. 시간과 사용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가격적 측면만 따진다면, 고가에 주식을 매수한 기업이 8년 후 상장폐지 되어 크게 손해를 입은 격이다. 하지만 그 오랜 기간 작곡에 사용하면서 초기보다 점증적으로 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그 샘플러는 나의 첫 장비였지만 난 정말 만족했고 조작법이나 음색에 있어 내게 아주 잘 맞는 스타일의 악기임을 느꼈다. 남들이 외장 장비를 1년만에 몇 차례씩 갈아치우는 것에 비해 난 그 장비를 8년이나 사용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교체 없이 사용하다 보니 여러 정교한 처리에 익숙해져서 사용도 편리했지만, 사실 그 오랜 기간 사용했으면서도 나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샘플러를 결과물에 100% 활용하진 못 했다.

난 일명 서태지 세대이기도 하고 그의 기존 음악들에 열광했던 사람이지만, 현재로서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점증적으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최근 음반의 곡들이 별로라는 얘기는 아니다. 단순히 나이와 경험에 따라 내 취향이 많이 변한 것일 수도 있고 예전의 그 시대 환경 속에서 예전의 내가 느꼈던 그 느낌과 달라서일 수도 있다. 더욱이 난 앞으로도 일정 시간 동안은 취미 겸 목표 달성을 위해 내 곡을 쓸 예정인데, 과거에 서태지라는 브랜드의 음악에 심취해 살았다 보니 무의식적, 심리적으로 얽매여 진정 내가 하고 싶고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음악에 대한 나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형성하지 못 한 측면이 있다고 판단하게 됐다. 향후를 위해서는 이러한 얽매임을 끊어야 할 시점이 됐음을 체감한다. 물론, 서태지라는 가수 겸 작곡자는 사실 초기를 제외하곤 내게 있어 음악 자체보다도 나의 삶이나 각종 사고방식에 많은 영향을 주고 나를 변화시켰다는 점 때문에, 비록 그의 음악이 예전같이 다가오지 않는다든지 신선함이 오래 가지 않는다 해도 분명 내 일생에 있어서는 잊지 않을 만한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일정한 컨셉이나 내게 맞는 스타일을 일찍 발견하지 못 해서, 그간 작업해 온 나의 습작 곡들은 작업된 수에 비해 매우 초라하고 일관성과 독자성이 부족하다. 지금까지 작업해온 습작 파일은 일련번호로 관리해 와서 한눈에 파악이 되는데 대략 150곡정도 된다. 물론 그 사이의 곡 번호 중에는 중단한 곡이나 기준 미달로 삭제한 곡도 있으며, 전체 곡수에 비해 지금 시점에서 건질 만한 곡은 별로 없다. 지금도 철들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지금보다도 철이 더욱 없었기에 그 긴 시간동안 이 분야의 내 능력이나 독자적 스타일을 크게 발전시키지 못 했다. 십 수 년 전에 이미 생긴 확고한 목표라면, 내 솔로 기념음반을 만들어서 최대한 많은 이에게 들려주고, 또 몇몇 다른 이들과 공동 녹음한 곡을 만드는 일이다. 일할 때는 의견 차이가 나거나 내 의견이 메인이 되지 못 하는 일을 참지 못 하는 성격임을 경험에 의해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곡 쓰는 자체나 편곡 단계를 남에게 맡기거나 같이 할 수는 없고, 단지 프로젝트 형식으로 완성한 곡에 보컬이나 세션 정도를 선별해서 같이 작업하는 정도만 가능할 것 같다. 그렇게 멤버를 선별하기 위해서는 내 뚜렷한 음악 스타일과 작곡 실력부터 입증해야 하므로 먼저 포트폴리오 작업을 해야 해서 수년 전부터 구상해 오는 중이다. 나의 이러한 작업 정책을 설명해주면 보통 많은 한국인은 좀 고압적이거나 냉정한 성격일 것으로 선입견을 갖는 경향이 있어 구인에 상당히 난관이 있는데, 이건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본 정서에 확실한 교정이 필요한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편견은 사실 일반인보다 음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더욱 심하다. 워낙 외곬으로 한 분야에 집중해서 파고드는 사람들인데다가 음악계라는 그 업계의 인습적인 특성상 견해들이 매우 한정적이고 철저한 인맥 위주의 구조와 관계로 인해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지나치게 적용되어 집단 이기주의의 양상을 띠며, 외부인에 대해(심지어 음악인들 내부에서도 격한 갈등과 격리시키려는 심리) 좁은 철장이 둘러쳐져 있고 시각이 매우 편협하고 특정 주제들을 놓고 대화해 보면 일부 사람들의 경우 이해력이 심하게 떨어져 애초에 얘기 자체가 안 통하기도 한다. 비하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 정말 그렇다. 이 점이 음악 업계 발전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는 한 중대 요인이다. 이것을 해당 집단이 자각하고 고쳐나가지 않으면 결국 서서히 자멸하고 내부 구성원 모두 공멸하게 된다. 외국인은 이러한 면에 있어서 상당히 개방적이고 다채로운 방식에 대해 매우 유연한 사고방식이라 같이 작업할 수만 있다면 매우 마음 편할 것 같다. 같이 만들어가는 재미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면 공동녹음도 꼭 해보고 싶다. 경험 끝에 깨달은 점은 어떤 일을 같이 할 때 상대방의 능력도 적정 수준은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진지한 자세, 일을 대하는 태도, 같이 일함에 있어 신뢰를 주고받는 마인드라는 것이다. 기왕이면 그 일을 통해 추구하는 비전이나 견해가 비슷한 사람일수록 같이 작업하기 좋다. 어릴 적엔 티브이에서 의견차이로 이혼했다든지 팀을 해체했다는 뉴스 기사를 보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 했는데, 내 나이 22세 이후로 그런 의견 차이라는 게 얼마나 큰 요인이고 엄청난 변수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어쩌면 팀원의 실력보다 100만 배 중요한 요인이 바로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일 정도로.


